▲ 유진 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가 1904년 말 사택에서 첫 성탄절 기념예배가 시초가 된 광주양림교회. 광주양림교회는 1906년 북문리로 이전하고 북문안교회로 불렸다.ⓒ데일리굿뉴스
▲ 유진 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가 1904년 말 사택에서 첫 성탄절 기념예배가 시초가 된 광주양림교회. 광주양림교회는
             1906년 북문리로 이전하고 북문안교회로 불렸다.ⓒ데일리굿뉴스

[데일리굿뉴스] 이새은 기자 = 광주광역시 남구 무등산 자락에 위치한 '양림 역사문화마을'. 이곳은 20세기 초 대한제국기에 선교사들이 거주하며 선교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목포에서 넘어온 선교사들은 양림동 언덕에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제중원(기독병원) 등을 지으며 근대계몽의 토대를 마련했다.

지난달 27일 방문한 양림동은 골목마다 고유한 정취가 느껴졌다. 한 세기 넘게 이어진 기독교 역사가 지금까지 숨 쉬고 있는 듯했다. 

양림 역사문화마을은 4.5km의 둘레길로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할 정도로 유서 깊은 기독 유산이다. 그러나 140여 년 전, 미국 남 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이 처음 발 디딜 때만 해도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양림동은 돌림병에 걸린 노인과 아이들을 버리는 풍장터로 한센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벌판이었다. 땅값이 비교적 저렴해 선교사들은 이곳을 거처로 정하고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세우며 '서양촌'을 형성해 갔다. 

탐방에 동행한 김정관 돌봄 여행사 대표는 "양림동은 식민지 근대가 도래하기도 전 개신교 선교사들의 계몽적 근대가 먼저 당도한 지역"이라며 "한반도 땅에 복음은 거저 들어온 게 아니다. 선교사들의 피와 눈물이 한반도 곳곳에 서려있다"고 설명했다. 

▲기독간호대학교에 위치한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곽은 회색 벽돌을 2층으로 쌓아 만들었고 내부는 목조로 이뤄졌다.ⓒ데일리굿뉴스
         ▲기독간호대학교에 위치한 오웬기념각. 오웬기념곽은 회색 벽돌을 2층으로 쌓아 만들었고 내부는 목조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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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의 시작점인 광주양림교회(김현준 위임목사)는 광주 땅을 밟은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곳이다. 유진벨(Eugene Bell) 선교사와 클레멘트 오웬(Clement Owen) 선교사가 1904년 말 목포를 통해 광주로 들어와 첫 성탄절 기념예배를 드린 게 시초였다. 두 사람의 헌신으로 성장한 교회는 1954년 붉은 벽돌의 고딕풍 건물로 새롭게 지어져 양림동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광주양림교회에서 남쪽 방면으로 300걸음 정도 걸어가면 '오웬기념각'이 보인다. 의사였던 클레멘트 오웬 선교사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을 기념하기 위해 유족들이 성금을 모아 지은 곳이다. 의료와 선교를 병행하며 가난한 이들을 돌보던 오웬 선교사는 광주 땅을 밟은 지 5년 만에 급성폐렴과 과로로 세상을 떠난다. 

오웬기념각은 1914년도에 지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대식 건물같이 보였다. 기념각에서는 아직도 예배나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유진벨선교기념관 지하 모습. 1층은 유진벨선교사기념관이며 지하는 양림동선교사기념관으로 꾸며졌다.ⓒ데일리굿뉴스
▲유진벨선교기념관 지하 모습. 1층은 유진벨선교사기념관이며 지하는 양림동선교사기념관으로 꾸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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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쏟아진 장맛비를 피해 들어간 곳은 유진벨선교기념관이었다. 기념관에는 전남 지역 최초 선교사였던 유진벨 선교사의 일대기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기록물과 사진, 편지, 타자기 등 그의 유품에서 당시 시대상이 보였다. 

기념관 도슨트인 한병채 문화해설가는 "유진벨 선교사는 개척 과정에 굴곡이 많았지만 묵묵하게 복음전파에 매진했다"며 "낯선 서양인에 대한 지역민들의 경계로 (그는) 정착하기 쉽지 않았고, 풍토병과 철도사고로 가족을 잃는 아픔까지 겪었다"고 말했다. 

지하 전시관에는 오웬, 포사이드 등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시돼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끈 건 '푸른 눈의 작은 예수'라고 불린 엘리자베스 쉐핑(Elisabeth Shepping) 선교사였다. 여성운동과 빈민구제, 간호 분야에 주력한 쉐핑 선교사는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고 정작 본인은 풍토병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했다. 

한병채 문화해설가는 "서서평 선교사로 알려진 쉐핑 선교사는 갈 곳 없는 고아와 과부, 한센인들과 함께 살며 복음을 전했다"며 "그녀의 방에 붙은 'Not Success, but Service'(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문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신을 내려 놓고 헌신한 초기 선교사들의 인생을 압축해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1982년 건립된 양림동 선교기념비. 선교기념비는 광주시립사직도서관 앞에 위치해있다.ⓒ데일리굿뉴스
▲1982년 건립된 양림동 선교기념비. 선교기념비는 광주시립사직도서관 앞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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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벨기념관 근처에는 선교사들의 헌신에 감화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조선인들에 대한 기념관도 여럿 있다. 오방 최흥종기념관과 소심당(素心堂) 조아라기념관이다. 

최흥종은 버려진 한센인 소녀를 자신의 말에 태운 포사이드 의료선교사의 모습에 감명받아 일평생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헌신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광주의 첫 장로이자 목사로 '광주의 정신적 지주'로 기억되고 있다. 

쉐핑 선교사 등에게 영향을 받은 조아라는 여성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며 평화와 인권운동을 주도했다. 그 또한 복음전파와 교육, 민주화 운동, 빈민구제에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선교사들의 정신을 이어갔다. 

김미희 조아라기념관 관장은 "조아라 선생은 선교사들이 세운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하고 이일학교에서 교사로 동역하면서 신앙인으로 뿌리 내렸다"며 "온갖 고난으로 점철된 시대 가운데서도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소외당한 자의 대변자로서 그들과 아픔을 함께했다"고 말했다. 

▲초기 선교사들과 가족들 23명이 입관된 양림동 선교사 묘원.ⓒ데일리굿뉴스
▲초기 선교사들과 가족들 23명이 입관된 양림동 선교사 묘원. ⓒ데일리굿뉴스

호남신학대 내부의 계단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양림동 선교사 묘원이 나온다. 오웬 선교사를 비롯해 유진 벨, 윌슨 선교사 등 초기 선교사들과 가족 23명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묘원 근처 선교사들의 사택과 이국적인 나무들의 모습, 평온한 풍경이 함께 어우러져 평안함이 느껴졌다. 선교사들이 향수를 달래고자 심은 피칸 나무 묘목들은 거대한 거목이 돼 세월의 흔적을 가늠케 했다.

김정관 대표는 "묘원의 위치는 유진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가 선교를 시작한 본거지이기도 하다"며 "당시 선교사들이 심은 호랑가시나무는 키가 자라 현재 6m에 달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도 많은 성장을 이뤘다"고 했다. 

▲3·1 만세운동 기념비.ⓒ데일리굿뉴스
▲3·1 만세운동 기념비. ⓒ데일리굿뉴스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에 있는 3·1 만세운동 기념비와  유진 벨 선교사를 기념하는 커티스 메모리얼홀이었다. 광주여학교의 후신(後身)인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는 그 자체가 선교의 산물이다. 방학 기간이라 학생들이 별로 없었지만 교정에는 활기가 느껴졌다. 

김 대표는 "광주가 다른 지역보다 개신교 복음화율이 높은 건 선교사들의 결실의 열매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사활을 걸고 믿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사들의 정신을 기억하며 한국 기독교 선교 140주년을 한국교회 회복의 모멘텀으로 삼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