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 최흥종
(五放 崔興琮, 1880~1966)
광주의 첫 장로이자 목사로 한평생을 빈민구제, 독립운동, 선교활동, 교육운동 등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개화기 광주의 정신적 지주이자 근대 광주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 광주 최초의 목회자
오방 최흥종 선생은 1880년 5월 2일 광주 출생으로 부모를 일찍 여의고 방황하였으나 유진벨을 통해 기독교를 접하고부터 삶의 변화를 맞이했다. 이후 의료선교사 포사이드와의 만남은 일평생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헌신하는 목회자의 길을 택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최흥종은 북문안 교회에서 광주 최초의 장로(1912)였으며 1921년 북문밖교회(중앙교회)를 설립하였고, 금정교회(1924-25)와 모슬포 교회(1929)의 목사로도 시무하였다. 1920년대에는 동포가 많이 거주하던 시베리아로 두 차례(1922, 1927)에 걸쳐 선교활동을 펼쳤고, 1930년대에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무등산에 들어가 신림 기도처를 만들었다.
◇ 민족·독립 운동가
오방 최흥종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및 사회운동에 참여했으며 기독교적 가치관을 직접 실천하는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으로 광주 근대사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에 참여하여 1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광주노동공제회와 계유부락부를 만들어 활동했으며, 1927년에는 좌·우합작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전남회장, 1935년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에 반대하여 교회의 각성을 촉구하고 사망통지서를 돌리고 무등산에 은거하여 나환자와 걸인들을 돌보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전남위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 청소년·교육운동가
오방 최흥종 선생은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을 인도하여 1920년 7월 29일 광주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하여 민족과 청년들의 계몽운동에 나섰다. 또한 북문안 예배당에 유치원을 개설하고, 여성들을 위한 야학을 설립하여 아동과 여성교육의 기반을 닦았다. 광주YMCA는 어비슨 선교사와 함께 농업실습학교(1933)를 설립하여 농촌부흥에도 힘을 보탰다. 1944년에는 광주의전(전남의대) 설립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해방 후에는 의재 허백련과 농업기술학교인 삼애 학원(1948)을 무등산 기슭에 설립하여 농촌지도자 양성에 힘썼다. 삼애(三愛) 정신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나라 사랑을 뜻한다.
◇ 사회복지 운동의 선구자(한센병 퇴치·빈민운동)
오방 최흥종 선생은 평생을 한센병(나병) 퇴치와 빈민운동에 바쳤기에 나병 환자의 아버지요 걸인들의 아버지로 불린다. 1909년 그는 광주 제중원(현 기독병원)에 근무할 때 포사이드 의료선교사의 희생에 감명받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1912년 봉선리 땅 1,000평을 기증하여 광주나병원을 설립하였고, 1927년에는 여천으로 이전하여 애양원을 설립했다. 1930년대에는 경성까지의 구라 행진과 나환자근절협회를 조직하여 구라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해방 후에는 1953년 남평에 음성나환자 자활촌 호혜원을 세웠고, 잇달아 결핵 환자를 위한 송등원(1956)과 무등원(1963)을 세워 병든 자,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위해 헌신하였다.
◇ 영원한 자유인
오방 최흥종 선생은 해방 이후 많은 사람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정계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기독교사회 운동가로서 생의 마지막까지 낮은 곳에서 걸인, 병자, 고아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 오방 최흥종 선생이 1966년 5월 14일 서거하자 광주시 사회장(5월 18일)을 거행하였고, 독립운동가로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오방 선생은 백범 김구 선생이 증여한 휘호처럼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을 사신 ‘영원한 자유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