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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도일보] 일제 저항 정신 보여준 광주 3·1만세운동 흔적들

  •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3-02-28 조회수 : 1,250

 

광주 첫 만세 시위는 기독교계 인물 주도
북문안교회·제중원·수피아여학교 등
구속된 103명 중 학생 53명…독립 기틀

3·1만세운동으로 투옥됐던 수피아학교 학생들.(1920년대)
앞줄 왼쪽부터 고연홍, 김필호, 기숙사도우미 최수향, 이봉금, 뒷줄 왼쪽부터 강화선, 이나열, 최경애, 양태원.
감옥에 갇혀 있다가 같은 날 출옥했다. /국가보훈처 제공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한국이 일본의 강제적인 식민지 정책으로부터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투쟁한 민족 독립운동이다. 독립운동자들은 민족 자결주의에 입각해 일본과의 저항의 마침표를 찍고 ‘독립 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자주독립 선언의 계기를 마련했다.

또 일본 제국의 한반도 강제 점거에 대해 저항권을 행사한 운동으로 한반도 전역과 세계 곳곳의 한인 밀집 지역에서 시민 다수가 자발적으로 봉기하며 한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한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용한 대한민국 연호는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남도일보는 3·1절을 맞아 광주에서 활동한 기독교계의 3·1만세운동의 여러 흔적을 살펴봤다.

◇광주 기독교계 3·1만세운동 기-승-전-결
지난 2019년 우리 사회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열기로 뜨거웠다. 각지에서 각종 기념행사와 학술회의가 열렸으며, 광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후 4년이 지난 현재 그 열기는 점점 식어가는 것 같다. 이는 광주뿐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그대로‘의향’을 자처하는 광주이기에 더욱 안타깝다.

3·1만세운동은 종교계, 그중에서도 기독교계와 천도교계의 역할이 컸다. 특히 광주는 기독교계가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 중심은 북문안교회와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였다.

한국에서 선교를 개시한 미국남장로회 선교부는 전주와 군산, 목포에 이어 1904년 광주에 선교 거점인 스테이션(Station)을 설치했다. 이후 복음선교를 위한 교회, 교육선교를 위한 학교, 의료선교를 위한 병원을 설립했다. 그 덕분에 광주는 개항장인 목포와 더불어 일찍부터 서구문명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3·1만세운동에 종교인들이 많이 참여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직’이다. 집회·결사의 자유가 억압됐던 1910년대 교회와 학교, 병원은 특별한 존재였다. 아무리 일제라도 신앙을 위해 교회에 모이는 교인들, 교육을 위해 학교에 나오는 교사와 학생들,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명분도 없이 막지는 못했다. 그 ‘조직’이 있었기에 기독교계의 3·1만세운동이 가능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광주 3·1만세운동 계획은 청소년·교육운동가 오방 최흥종(목사) 선생과 광주 3·1만세 운동의 총책임자 김복현씨가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3월 2일 상경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최 선생이 3월 4일 남대문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자 김복현씨만 다시 광주로 내려왔고, 3월 6일 양림동 남궁혁의 집에 모인 인사들을 중심으로 거사가 추진됐다.

이 자리에는 삼합양조장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이른바 ‘신문잡지종람소’ 그룹 청년들도 참석했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을 분담했고, 마침내 3월 10일 오후 3시경 광주교 밑 모래사장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했다. 만세시위는 11일과 13일, 26일에도 계속됐고 상인들은 26일 철시하며 동조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과 학생들이 일경에 체포됐다. 수피아여학교 학생 윤혈녀(윤형숙)은 일경이 휘두른 칼날에 한쪽 팔이 잘렸는데도 다시 다른 손으로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쳐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일제만행을 묘사한 중국언론의 3·1운동 보도. 만세를 부르던 윤혈녀(윤형숙) 학생의 팔을 잘라버리는 장면이다. /남도일보 DB

◇광주 3·1운동의 주역들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의 연구에 따르면 광주 3·1운동으로 103명이 구속돼 재판에 회부됐다. 이들은 김복현 외 21인과 박애순 외 76인, 황상호 외 2인, 그리고 최영섭 등이다. 이들 중 절반인 53명이 학생이었다.

이들에게는 출판법 위반과 보안법 위반이 적용됐다. 이들 중 송광춘은 재판을 받던 중 대구 감옥에서 사망했다. 최연소자는 수피아여학교 학생 강화선(16세), 최연장자는 본촌면 일곡리의 이주상(52세)이었다. 특히 기독교인인 이주상은 아들 이윤호, 이창호와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재판을 받은 103명 중 59명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아직도 서훈되지 못한 분들도 44명이다.

광주만세운동 당시 불렸던 독립가. /국가보훈처 제공

◇광주 3·1운동 항쟁 의의
광주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 중 이주상 삼부자처럼 이후에도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을 전개한 이들도 여럿이다. 김복현은 조선노동공제회와 신간회 광주지회, 김강은 신간회 광주지회와 광주YMCA, 손인식은 조선노동공제회와 광주YMCA에서 활동했다. 특히 최흥종은 기독교 목사이자 이 지역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의 지도자로 현재까지도 추앙받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3·1만세운동 참여는 일회성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1920년대 이후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현행 기자 lhh@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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